FROM ME TO YOU #YOOINYOUNG

It's me, Yu In Young



흑과 백, 세상이 여배우를 보는 시선의 경계에 유인영이 서 있다. 연기 생활 10년을 훌쩍 넘긴 베테랑 배우의 다음 도착지는 어디일까.

새롭게 그려지고 채워지길 갈망하는 흰 도화지 같은 그녀의 얼굴이 제 모습을 드러낸다.



스튜디오 분장실에서 유인영이 나오길 기다렸다. 촬영 전 “잘 부탁한다”는 간단한 인사만 나눈 상태였다. 화장 전, 그녀의 얼굴이 유난히 하얘 보였다. 위아래로 흰 슈트를 차려입고 은빛 하이힐을 신은 유인영이 성큼성큼 촬영장으로 들어섰다. “우와!” 스태프들의 크고 작은 웅성거림. 아름다운 무엇인가를 보고 자연스럽게 터져나온 탄성이었다. 주변의 반응에 그녀의 입가에 살짝 미소가 감돌았다. 촬영이 시작됐고, 쳇 베이커의 나른한 목소리에 맞춰 그녀가 몸을 움직였다. TV 드라마에서 익숙하게 봐온 ‘악녀’ 이미지를 애써 떠올렸다. 욕망이 들끓는 눈빛에 하이톤 목소리로 상대 배우를 향해 화를 내뿜는 모습 말이다. 고개를 들어 카메라를 넌지시 바라보는 도도한 표정에 언뜻 그런 모습이 중첩되기도 했다. 그러나 그녀는 몸을 뻗어 자유롭게 감정을 표출하기보다 자신의 주위에 어떤 막을 만들려고 애쓰는 것처럼 보였다. 여린 손가락으로 제 목을 감싸거나 어깨를 잔뜩 웅크린 몸동작이 그녀의 성정에 더 맞는 제스처 같았다. 에디터가 준비한 질문지가 어쩌면 너무 상투적인 것은 아닐까 마음이 조급해졌다. ‘진짜’ 그녀가 궁금했다. 당신은 누군가요?











오늘 촬영은 어땠나? 첫 등장이 무척 아름다웠다. 샘 스미스의 ‘I`m Not The Only One’을 틀고 마지막 컷을 찍을 때는 눈물도 살짝 보였다. 
초반엔 모델 같았고, 마지막엔 천생 연기자였다. 안 그래도 첫 의상이 마음에 들었다. 슈트를 입고 분장실에서 스태프들에게 농담 삼아 이런 말을 했다. “내가 남자였으면 여자들한테 인기 진짜 많았을 거야.” 이런 느낌의 화보는 오랜만이라 촬영 내내 재미있었다. 연예계 활동 초반에는 모델과 연기자라는 두 역할이 혼란스러웠다. TV 광고와 화보 모델 활동을 먼저 시작해서 내가 어떤 포즈와 표정을 해야 더 예쁘게 나올지 여우같이 알았다. 배우 생활을 하면서 한동안 그런 모습이 싫었다. 일부러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있어본 적도 있다. 배우가 촬영한 화보는 어딘가 달라 보이지 않나. 친한 선배들은 왜 너의 장점을 감추느냐며 힘을 북돋아주기도 했다. 그런 면에서 오늘 촬영은 유인영이란 배우의 두 면모를 다 보여줄 수 있는 기회였다.



SBS의 새 수목드라마 <가면>에 출연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비밀>로 호평받은 최호철 작가와 화제를 모은 <상속자들>의 부성철 감독의 랑데부라 기대가 크다. 어떤 역할인가? 
큰 맥락에서 보면, 또 부잣집 딸이다. 사랑 빼고 모든 걸 가진 여자, 그 사랑을 갖기 위해 무모한 복수를 시도하는 여자다. 한 신문 기사에는 악녀라고 나왔지만, 꼭 그렇진 않다. 최호철 작가의 전작처럼 캐릭터의 성격이 꽤 복합적이다. 나를 포함해 수애, 주지훈, 연정훈까지 네 주인공이 한 집에서 함께 생활하며 이야기가 펼쳐진다. 비밀을 숨기려는 인물도 있고 그 비밀을 캐내려는 인물도 있다. 이야기 구조가 얽혀 있어 자세히 설명하려면 끝이 없다. 드라마를 직접 보는 게 이해가 빠를 것 같다.



부잣집 딸이라는 단어도 그렇지만, ‘또’ 라는 부사가 더 귀에 박힌다. 그간 맡은 역할에 대한 당신의 복잡미묘한 감정이 느껴진다. 우리에게 익숙한 유인영이란 배우의 이미지는 2007년 방영해 시청률이 40%를 넘긴 일일극 <미우나 고우나>에서 만들어졌다. 그런데 필모그래피를 다시 살펴보면서, ‘유인영은 욕심이 많은 배우구나’ 생각했다. 미혼모, 트랜스젠더, 복서 등 기존 여배우가 꺼리는 독특한 역할을 다방면에서 소화했지만 큰 빛은 못 봤다. 그럼에도 ‘또’ 부잣집 딸 역을 맡은 이유가 있나? 
작가와 감독에 대한 신뢰가 가장 큰 이유다. 솔직히 최근 몇 년 사이 마음이 조급했다. 내 이미지가 한 캐릭터로 굳어지진 않을까? 대중이 나한테 원하는 모습은 부잣집 딸뿐 일까? 지적했듯이, 나는 영화나 단막극에서 되도록 색다른 시도를 지속했다. 서로 다른 두 편의 시나리오가 있으면 흥행과는 거리가 조금 먼 비주류의 작품을 선택하는 식이었다. 대중의 기억에 깊이 남지 못했지만, 이런 역을 연기하면서 많은 경험을 쌓을 수 있다며 위안 삼았다. 한데 지금은 생각이 좀 바뀌었다. 아무리 열심히 해도 누군가 봐주지 않으면 그 노력이 소용없다는 걸 깨달았다. 또한 내가 해온 부잣집 딸 역할과 비슷한 측면이 많아도 <가면>을 통해 얼마나 입체적이고 설득력 있는 캐릭터를 보여주느냐가 훨씬 중요하다고 마음을 고쳐먹었다. 요즘은 대본을 보면서 표정, 목소리, 몸짓 등 여러 측면에서 캐릭터를 깊이 있게 연구 중 이다. 매번 새로운 역을 맡으면 사전 준비를 철저히 했지만, 이번 작품이 가장 바쁜 것 같다.

 


 


<가면> 이전의 행보는 배우 유인영의 터닝 포인트처럼 읽힌다. <기황후>와 <삼총사> 두 편의 사극에 잇따라 출연했고,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별에서 온 그대>에는 주연 여배우 전지현의 상대역으로 특별 출연했다. 첫 사극 출연부터 단역까지, 자존감으로 생명력을 유지하는 여배우라면 쉽지 않은 결정 아닌가? 
그때가 서른을 넘길 무렵이었다. 내 진심은 그렇지 않은데, 보는 사람에 따라 자칫 오해가 생기는 일이 다반사다. ‘저 배우 왜 저런 거 하지? 잘 안 나가나?’ 이런 편견이 있을 법 하다. 어떤 배우건 점차 몸값을 높이고 싶어 하지 않나. 나라고 세간의 말을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연기자로 데뷔한 지 10년을 넘기고 서른이 되면서 그런 부분은 내게 중요치 않게 됐다. <별에서 온 그대>에서처럼 하고 싶은 연기가 있으면 작은 역할 이라도 맡아서 해보는 게 맞다. 그게 배우다. <기황후>는 내가 처음으로 제안받은 사극이었다. 사극에 꼭 출연하고 싶었지만, 공포심도 컸다. 내 말투나 목소리 톤이 사극과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스스로 반신반의했다. 다행히 연비수라는 역은 기존 사극에 등장하는 가냘픈 여인 컨셉이 아니었다. 처음엔 3회 정도 특별 출연만 계획돼 있었는데, 시청자의 반응이 좋아 드라마 종영 전까지 등장했다. 








뭐랄까, 연기 생활 10년 차를 넘긴 여배우의 여유와 연기를 향한 애정이 물씬 느껴진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보자. ‘유효민’(본명)이라는 고등학생이 패션 잡지를 보다 ‘내가 이들 보다 잘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자신감 하나로 이 세계에 발을 들였다. 그렇게 유인영이라는 배우가 탄생한 셈이다. 광고 모델, 뮤직비디오 출연으로 화려한 신고식을 치르고 TV 드라마 주인공까지 꿰찼다. 영락없는 신데렐라 스토리다. 이후 연예계에서 정말 쉼 없이 활동했다. 서른을 넘기며 무슨 생각을 했는지 궁금하다. 
나도 이렇게 오랫동안 이 일을 할 줄 몰랐다.(웃음) 처음 CF 모델을 할 때는 마냥 즐거웠다. 어린 나이에 돈도 많이 벌고, 전문가가 항상 나를 예쁘게 꾸며주니까 진짜 신데렐라가 된 기분이었다. TV에 나오는 내 모습도 신기했다. 뮤직비디오나 CF에서는 예쁘게만 보이면 됐다. 2004년 KBS 드라마시티 <오! 사라>라는 작품으로 처음 연기에 도전하면서 마음가짐이 달라졌다. 이상할 정도로 진지했다. 그렇게 연기 욕심을 채워가는 시간이었다. 배우 생활 10년, 그리고 여배우로서 서른을 넘기며 특별한 감회는 없었다. 그저 감사했다. 잠깐 나왔다 사라지는 연기자가 부지기수인 이곳에서 10년 넘게 연기 활동을 지속했다는 점. 그리고 내가 이 일을 정말 좋아하는구나 생각했다. 쉬고 있으면 현장이 그립다. 주변에서 ‘워커홀릭’이라고 많이들 얘기한다. 낯을 가리는 성격인데도, 현장에서는 처음 만난 이들과 잘 어울린다. 쉴 때도 가만히 있지 못하는 편이다.




쉴 때는 어떤 시간을 보내나? 
최근 사극 <삼총사>를 끝내고 제법 오래 쉬었는데, 나만 놀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게 너무 싫었다. 금속공예, 도자, 향초, 사진 등 무언가를 배우거나 만드는 일을 즐긴다. 올겨울에는 루피망고로 모자를 만들어 지인들에게 선물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건 2010년에 단편영화 <즐거웠던 시간만을 기억해줄래>를 제작한 일이다. 한 어린 소녀의 성장기를 그린 영화다. 당시 8년 넘게 일하면서 처음으로 길게 쉬던 시기였다. 소속사 문제도 있었다. 뭐라도 하지 않으면 미칠 것 같았다. 그래도 연기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싶었다. 결심하면 실천하는 성격이라, 시나리오 작업부터 촬영 준비까지 하나 둘 영화 작업을 진행했다. 다시는 하고 싶지 않을 정도로 힘들었다. 감독의 마음을 이해하는 계기가 됐다.(웃음)




의외다. 연기 이외에 그런 ‘다재다능한’ 모습으로 대중에게 더욱 어필하고 싶지 않나? 요즘은 연예인의 사생활을 거리낌없이 공개하는 예능 프로그램이 대세다. 작년에 <런닝맨>에 출연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만큼 예능 프로그램 출연이 적었다는 방증도 되지만, 대중이 유인영의 실제 모습을 궁금해한다는 의미 아닐까? 
보통 프로그램에 나를 맞춘다. 그쪽에서 코믹한 것을 원하면 그렇게 한다. 드라마에는 주로 예쁘게 꾸민 모습으로 등장하지만, 망가지는 것 자체에 큰 두려움은 없다. 그런데 아직도 연기 이외에 내 실제 모습을 보여주긴 부담스럽다. ‘나 이런 것도 하니까 알아주세요’ 하는 게 영 어색하다. 매사에 조심스러운 A형 염소자린데, 친구가 나보고 ‘소시지’라고 말한다. 소심하고 세심하고 지랄맞다고.(웃음) SNS에 사진 한 장을 올리면서도 생각이 많다. 촬영장에서도 하나부터 열까지 머릿속에서 정리가 안 된 상태로 슛이 들어가면 혼란스럽다. 혼자 익숙해질 때를 기다리는 스타일이다. 예능의 생명은 순발력이 아닌가. 얘길 나눠봐서 알겠지만, 나는 말도 느리고 조리 있게 말하지도 못한다. 이런 내가 예능 프로에 자주 출연하는 건 민폐다.




오늘 인터뷰를 하면서 한 시청자로서 유인영이라는 배우에 관한 고정관념이 깨진 부분이 많다. 이런 질문 많이 받았을 것 같지만 그래도 궁금하다. 유인영에게 ‘여배우로 살아가기’란 어떤 의미인가? 
신인 시절에 가장 많이 받은 질문은 “꿈이 뭐예요?”였다. 나는 한 단계 한 단계 목표를 성취하면서 큰 기쁨을 느끼는 타입이다. 나에 대한 편견과 오해를 억지로 풀려고도 하지 않았다. 우연히 기회가 되거나 시간이 자연스럽게 흘러 내가 선보인 각양각색의 모습을 누군가 뒤늦게라도 알아봐줬으면 싶다. 그리고 여배우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으면 좋겠다. 그 이외의 일은 몰랐으면 한다. 여배우의 사생활을 알고 싶어 하는 대중의 심리는 충분히 이해한다. 세상의 모든 여배우는 좋고 예쁜 모습을 보여주려고 부단히 노력한다. 여배우라 힘든 일은 철저히 스스로의 몫이다. 나도 마찬가지다.





에디터 서재희, 김재석

사진 유영규

캐스팅 양수진(But)

의상 스타일링 황정희(Gemma)

헤어 이선영

메이크업 이영

출처 노블레스맨 창간호